테스코 세일에서 까이양을 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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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코 세일에서 까이양을 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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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첫날에 제가 주로 하는 일은, 무가지의 정보 모으기와 세일 품목 모으기입니다.

저녁 때에는 우리나라 마트와 마찬가지로 하룻동안 팔고 남은 식품들을 세일하기 때문에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 또는 한 번도 안 먹어 봤지만 싼 맛에 시도해 볼까 하는 것들을 사 가지고 옵니다.

이런 세일은 번화도가 낮아질수록 일찍 시작하고, 관광지에 속하는 방콕 한가운데에서는 좀 늦게 시작하는 편입니다.

 

이번 여행 때에는 저녁 10시쯤 온눗역 테스코에 들러 보았는데

테스코는 저녁이 되면 주로 입구 앞에 그날의 세일 품목들을 쌓아 놓는 경향이 있어요.

대강 아래와 같은 느낌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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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를 아직 안 하고 있었는데, 까이양 가격이 꽤 괜찮아서

그린 망고 깎은 것과 함께 바구니에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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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구니를 들고 한참 쇼핑을 하고 있을 때에

델리 코너에 이렇게 태국분들이 와글와글 모여 계신 걸 봤습니다.

사실 이런 광경은 지방 소도시나 방콕 변두리에서, 7시 반 쯤에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기는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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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렇게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는 핫딜(hot deal)이 있는 터,

저도 이분들에게 다가가서 슬쩍 무리에 끼었습니다.

그리고 여쭤 보았습니다.

 

-무엇을 기다리고 계셔요?

 

그분들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까이양 세일요.

 

정말로 여기에도 노란 딱지를 단 까이양 한 무더기가 쌓여 있더군요.

그것들도 이미 세일 표시가 붙어 있는 까이양이고, 가격도 입구 쪽이나 여기나 양쪽이 다름이 없길래 저는 물었습니다.

 

-(제 바구니에서 까이양을 꺼내 보여 드리면서)이것도 싸지 않나요?

 

그랬더니 한 분이(제 태국어가 하도 서투르니 태국어로는 설명이 안 되시는 듯)

까이양 팩의 노란 딱지를 가리키면서

바로 밑에 딱지가 또 하나 붙을 거라는 시늉을 하셨습니다.

이해가 바로 가더군요.

그래서 저는 당장 제 까이양을 꺼내서 그 선반에 내려놓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 세일은 언제 하나요?

-(다들 웃으시면서 합창으로)몰라요.

-그냥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군요(마침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라는 표현이 제 폰의 태국어 단어장에 있었습니다).

-그래요.

 

저녁의 세일 사냥꾼들끼리는 국적을 불문하고 서로 마음이 통하는 모양입니다.

그분들은 오늘 밤엔 어떤 외국인도 당신들과 함께 세일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재미있어하시더군요.

그러더니 한 분께서 갑자기 일본어로 제게 물으셨습니다.

 

-당신은 일본인인가요?

-아닙니다.  한국인입니다.

-그렇군요.  당신, 귀엽(可愛)군요.

-앗, 고맙습니다!

(이렇게 일본어를 하게 되는 상황은 연세가 좀 지긋하신 어른들하고 자주 있는 일이고,

10-20대와 만나면 한국인이냐고 묻고 우리말을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분들은 또 웃으시면서, 제가 알아들을 수 없는 태국어로 당신들끼리 한창 재미있어하셨습니다.

이분들과 함께 있는 것이야 좋지만, 기약도 없는 세일을 기다리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걸리겠다 싶어서

까이양은 진짜로 세일 딱지가 더 붙은 후 가장 마지막에 사야 하겠다 결심하고, 저는 다른 섹션을 다 둘러보고 그 자리에 다시 왔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그 잠깐 사이에 세일은 이미 진행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돌아왔을 때에는 그 자리의 거의 모든 분들은 자신의 까이양을 이미 챙겨서 가신 뒤였습니다.

마치 버펄로 떼가 지나간 후의 황량한 초원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했던 일은 그 뒤에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남아 계신 분이 세 분 정도 계셨는데

그 중 한 분이 제게, 당신이 가지고 있던 [밑의 노란 딱지가 한 번 더 붙은] 까이양을 가지라고 주시는 겁니다.

세일을 함께 기다렸던 의리+외국인을 대우해 주시는 마음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이건 미안해서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는데, 저는 그냥 [미안합니다]라고 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세일 득템에 성공하지 못한 건, 끝까지 기다리지 않은 제 책임이니까요.

 

그렇게 돌아서는데 갑자기, 제가 이곳에 들어올 때에 입구에 쌓여 있었던 까이양 무더기가 생각났습니다.

혹시 하고 가 보니, 그 자리에는 아직 3차 세일을 겪지 않은 까이양들이 여전히 쌓여 있더군요.

태국인에게 기다리고 양보하는 미덕이 있다면, 한국인에게는 공리를 위해 직접 행동하는 미덕이 있습니다.

저는 그곳의 까이양을 몽땅 가지고 가서 직접 델리 코너에 옮겨 놓았습니다.

다행히 곧 그 까이양들에도 세일 딱지가 일제히 붙었고,

저를 포함해 모든 분들이 세일의 혜택을 가지고 기분 좋게 귀가할 수 있었습니다.

석기 시대의 사람이든, 방콕의 여행객이든, 사냥에 성공하여 고기를 챙긴다는 것은 흐뭇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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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닭은 너무 커서, 3일 내내 곁들이는 음료수만 바꿔 가면서 까이양과 그린 망고, 함께 산 하가우만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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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제 최종 장바구니)

그래도 뭐, 좋아하는 것만 먹으니 좋았습니다.


52 Comments
조달달 2016.07.03 22:01  
재밌게 읽었어요 ㅋㅋ 저녁 마트세일은 한국에서도 태국에서도 있나보네요
GAGAGA 2016.11.18 15:46  
이야.. 24밧에 사시다니 대단하다~~ 저두 이번에 가는데 테스코가서 한번 노려봐야겟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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